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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화끈한 고백
    복음묵상 - Lectio Divina 2020. 4. 19. 10:52

     

     

    요한 20,19-31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얼마 전 모 신문사에서 ‘불안’에 대한 인터뷰를 제게 청해 왔어요.

    “우리들 삶의 불안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제가 “샬롬”(shalom)을 조금 풀어가며 답변하기 시작했습니다만,

    하여간 그때 느꼈던 건 답답함이었어요.

    기자는 철저히 세상적인 관점에서 평화를 이해하고자 질문을 던졌다는 거죠.

    그에 맞춰 저 역시 세상적인 이해의 틀로 평화를 설명하려는데.. 

    예수님을 빼놓고 평화를 얘기하려니, 말이 안 되는 거죠.

    곧 신앙인이 누리는 평화와 세상 사람이 누리는 평화의 차이,

    이건 어떻게 딴 걸로 메꿔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게 현실입니다. 

    예수님 없는 평화를 어디가서 누리려 해 보세요. 그 평화? 

    일시적인 평화고, 부분적인 평화며, 비본질적인 평화예요.

    허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오늘 이 딱 하나의 사건! 이 하나의 현실! 

    이것이 우리에게 완벽한 평화를 줍니다. 

    이게 우리 신앙의 핵심이에요. 

     

    여러분, 다시 한번 제가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두렵다 하여 평화를 찾겠다고 세상을 돌아다녀 보세요. 

    어디서 평화를 만날 수 있을지 저는 장담합니다. 

    결국 예수님 아닌 평화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예수님께로 오시어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그전 토마스의 행적을 보면, 그가 꼭 이공계 두뇌를 지녔던 이란 걸 알 수 있죠. 

    얼마나 이공계 스타일이었던지, 예수님께서 한 번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4).

    토마스는 이에 다음과 같이 따져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마치 수학하듯, 물리학하듯 논리적으로 질문을 한 겁니다.

    그런 토마스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논리론자에게도 부활을 입증해 주고 싶으신 거예요. 

    자, 그래서 다른 제자들의 부활 증언에도 토마스는 “나는 확인해 봐야된다, 검증이 돼야 된다”(요한 20,25 참조)라면서 심정적으로 토라집니다. 

    저같아도 토라지죠. 여태까지 다 같이 움직였는데, 자기만 잠깐 없는 사이 주님께서 나타나시다니요. 

     

    여드레 뒤, 예수님께서 오시어 그런 토마스에게 1대 1 코칭을 하십니다. 원어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이런 말씀이 됩니다. 

    “안 믿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거라.”

    제가 늘상 이 묵상에서 해드린 말씀이죠. 

    ‘의심을 버리고 믿는 것’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로 갈 공산이 커요.

    “요거는 쪼끔 미흡해~ 조거는 믿을 만해~” 

    예수님께서는 저런 믿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게 아닙니다.

    “믿는 자” 곧 “통으로 믿으라” 하십니다. 

    다시 말해 “진실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으면 하나하나 따질 필요가 없게 된다”는 뜻이죠.

    “토마스야, ‘부활이 진짜냐, 아니냐?’를 보지 말고, 내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만 통째로 믿어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못할 게 어디 있느냐? 그러니 하느님 한분만 믿으면 나머지는 다 되는 거 아니냐?”

     

    우리 역시 “믿는 자”가 되면 다 믿어지게 됩니다. 

    “안 믿는 자”가 되면 다 의심하게 됩니다. 

    부부사이에서도 그렇잖아요. 서로가 ‘믿는 자’의 상태라면 가장 이상적일 겁니다. 

    그런데 ‘안 믿는 자’가 되기 시작하면 하나하나가 의심거리고 관계가 무너지죠.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토마스를 바꿔주십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랬더니 토마스가 다 생략합니다. 

    “그분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과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보겠다던”(요한 20,25 참조) 것을 말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보았으니까요. 예수님이십니다!

    무릎을 딱 꿇고 저 고백을 외치죠. 

    일전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드린 신앙고백 곧,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 말씀이 한 3루타에 해당하는 고백이었다면,

    그 의심많던 토마스가 오늘 홈런을 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을 해버렸어요. 

    모든 의심이 걷히니 고백도 화끈하게 이뤄짐을 우리는 확인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늘 우리들은 보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행복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또 보여요. 

    자꾸 ‘보지 않고 믿는다’는 말에 족쇄가 걸려 안 보려고 하지 마세요. 

    보지 않고 믿었더니, 보이는 겁니다. 

    지금 보이시나요? 그렇습니다, 보입니다.  

     

     

    원문 출처: 차동엽 신부, 2014년 4월 27일 복음묵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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