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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님 부활 대축일 - 낮 미사] 진짜배기 부활
    복음묵상 - Lectio Divina 2020. 4. 12. 17:40

     

     

    복음: 요한 20,1-9

     

    오늘 드디어, 축제일을 맞았습니다.

    죽었던 예수님,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데, 왜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가? 

    우리를 부활시켜주시기 위해, 길을 닦아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표하여 먼저 죽으시고, 먼저 부활하시어,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죽어서만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살아서 매일매일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은혜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 20,1)

     

    마리아 막달레나가 제일 먼저 부활의 증인이 됐죠.

    그 이유가 오늘 복음서 첫 문장에 나옵니다. 

    아주 짧은 문장인데도 이 안에 많은 것이 함축돼 있습니다. 

    우선 “주간 첫날”, 곧 주일날이에요.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일어나 움직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서려면 사실 밤새 뒤척여야 돼요. 밤새.

    이 여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 사랑’만 가지고 뒤척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셨는데, 횡사당하다시피 하셨는데… 

    그런 그분을 위해 나머지 장례나 제대로 치러 드리자…’ 하는 마음을 먹고

    합법적으로 움직일 시간만 기다린 겁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아직도 어두울 때에” 나서며 말입니다.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요한 복음에서만 만날 수 있는 심오한 뜻이 이 말씀에 담겨 있지요.

    다른 공관복음에서는 “(돌이) 굴려지다”라는 표현으로 나옵니다.

    여기 돌이 “치워지다”란 것은 곧 “없어졌다”는 뜻이에요. 

    무덤 속과 무덤 밖 경계가 없어진 거죠.

    죽음의 공간과 삶의 공간이 열리게, 트이게 된 거죠.

    요한복음 저자의 예리한 시각에서 비롯된 특별한 관찰이 묻어나는 대목입니다.

    결국 이 얘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허무셨다는 겁니다.

    우리 삶의 영역으로 부활이 들어와 버렸어요. 죽음을 없이 하신 거죠.

    이것이 오늘 이 묵상 서두에서 암시한 부활의 의미입니다.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베드로가 주님 부활 현장을 보고서도 단순히 “보았다”(요한 20,6)라고만 언급된 반면

    “다른 제자”로 등장하는 요한은 “보고 믿었다”(요한 20,9)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만 유추해 본다면

    베드로가 ‘이게 무슨 일일까?’라는 단계에만 머물러 있을 때, 요한은 주님 부활을 진정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무덤에 달려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깨닫지 못했던 그 성경 말씀을 말입니다(요한 20,9 참조).

    똑같이 성경을 보고

    똑같이 성경을 들어도

    어떤 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하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자기 자신을 살리는 말씀이 됩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진짜 부활하셨다면, 죽음을 없이하셨다면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상징되는 그것들이 대체 무슨 힘을 발휘하겠는가?

    다 지나가는 것이야. 부활이 진짜배기인 거야! 그러기에 희망이 있는 거야.’

     

    여러분도 요한 사도처럼

    보고 믿으시기 바라고 

    듣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느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지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설득력 있는 부활의 증거니까요. 

     

     

     

    원문 출처: 차동엽 신부, 2017년 4월 16일 신나는 복음묵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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