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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영원한 삶과 심판
    복음묵상 - Lectio Divina 2020. 6. 7. 12:12

     

     

     

    요한 3,16-18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

     

    복음에 들어가기 전, 오늘 제2독서 말씀 한 구절에서 우리는 3위 하느님을 만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먼저 예수님을 말씀하시는데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이는 곧 ‘기쁜 소식’이죠. 은총이란 거저, 공짜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니까요. 

    그 가운데 제일 큰 선물이 뭔가요? 

    영원한 삶입니다. 

    그다음으로 예수님을 파견하신 하느님을 말씀하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을요. 

    이어서 교회의 시대로 접어들어, 이 시대 교회 안에 충만히 활동하고 계신, 임재하고 계신 성령을 말씀하십니다.

    그 성령께서는 “친교”이시고요.  그 친교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뭔가를 나누기도 하고, 이 성령께서 우리와 예수님을, 또 우리와 하느님을 중재해 주시기도 한다는 겁니다. 

     

    이를 전제로 본다면, 오늘 우리에게,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먼저 가까이 계신 분은 성령님이시죠. 

    이 성령께서 2천 년 전의 예수님을 체험케 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을 갖게 해 주시니까요. 이를 성령의 매개, 곧 성령의 친교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우리가 영원한 삶을 떠올릴 때, 언뜻 길이에만 초점을 맞춰 생각하죠. 다시 말해 ‘오래간다’, ‘끊기지 않는다’와 같은. 

    허나 궁극적으로 영원한 삶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그러니까 “아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참조)라는 말씀대로, 이 영원한 생명을 지금 이미 누리고 있는 우리는 그 질적인 차원에 눈을 뜰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저 세상적 삶과 차별 없이 쭉- 양적인 삶이 아니라 확실히 독특하게 세상의 생명 하고는 다른 차원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박동하고 있다는 것을요. 

    만일 우리 가운데 어떤 이가 이 세상 근심, 시름, 미움에 쩔어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영원한 삶을 깨닫지 못한 겁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는 이라면, 질적으로 이미 그는 환희 속에 있어야 돼요.

     

    세상의 고통 중에서도 우리는 환희 속에 있어야 합니다. 

    기쁨 속에, 흔들리지 않는 평화 속에, 행복 속에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임재, 예수님의 함께하심, 그 안에 우리가 함께 잠겨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언젠가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처럼 

    오이지처럼 찡그린 얼굴을 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움직이는 이들은,

    사실 이미 심판받은 이들과 비슷한 삶을 사는 거라 할 수 있겠죠.

    심판을 받았다고 단언은 못해도, 차별성이 없는 삶을 사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받은 이들의 용어는 뭔 줄 아세요? 

    절망입니다. 분노입니다. 원한입니다. 불평입니다. 

    심판받지 않는 이의 삶은요? 

    희망입니다. 사랑입니다. 감사입니다. 긍정입니다. 찬미입니다.

    이렇듯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영원한 삶이 내 안에서 박동되도록 성령께 도우심을 청해 봅시다. 

     

     

     

    원문 출처: 차동엽 신부, 2014년 6월 15일 복음 묵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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